남극점 최초 정복
남극점 최초 정복 |
남극점 최초 정복
남극점 최초 정복
1)남극의 개척자
1910년, 노르웨이의 아문센과 영국의 스코트는 각기 탐험대를 꾸려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북극은 1년 전에 미국인인 피어리가 이미 정복해 버렸으므로 남극을 최초로 정복한다는 것은 개인의 명예와 국가 자존심이 걸린 과제였다. 2년이 채 지나기 전, 이들은 차례로 남극점을 밟았다. 그러나 1등에게는 기쁨과 영예가, 2등에게는 실망과 좌절,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구 최후의 오지, 남극
어디를 보아도 눈, 얼음, 그리고 바람. 지구상에 존재하는 얼음의 90%가 모여 있는 이곳은 남극이다. 남극의 하늘에 떠오르는 해는 종종 둥근 모양의 띠를 두른다. 햇빛은 대기 중에 떠 있는 눈과 얼음 알갱이들에 산란·굴절되어 곳곳에 아름다운 빛의 기둥과 무지개를 만들어낸다.
펭귄과 바다표범, 바다새 종류가 살고 있을 뿐, 극심한 추위와 빙하, 얼음절벽으로 인해 남극은 지금까지도 인간이 접근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얼음땅이기 때문에 지질 및 지구환경 연구에 좋은 자료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극지방이므로 천체관측과 인공위성 추적에 용이하여 남극은 학문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세종기지를 비롯하여 세계 18개 나라에서 30개 이상의 상주기지를 세워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남극점에는 ‘아문센스코트 기지’라고 명명된 기지가 있다. 연평균기온 영하 49°C의 지역에 위치한 이 관측기지는 미국에서 1957년 설치했고 해마다 20명 가량의 대원이 겨울을 보낸다. 기지 이름은 남극점 첫 도착을 위해 생사를 걸고 경쟁했던 아문센과 스코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910년부터 1912년까지 이루어진 그들의 남극 탐험은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스코트가 이끄는 남극 탐험대의 출발
로버트 F. 스코트는 1862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해군 장교였던 그는 일찍이 성실함과 재능을 인정받아 1899년, 31세의 나이로 남극 탐험대의 대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섀클턴, 윌슨 등과 함께 떠난 제1차 남극 탐험(1901∼1904)에서 이태 연거푸 월동하면서 탐사를 했고 남위 82도 17분 지점까지 진출한 다음 영국으로 돌아왔다.
병으로 인해 남극에서 1년만 월동하고 돌아왔던 섀클턴은 1907년에 다시 짐을 꾸리고 출발하여 1909년까지 자남극(지구 자기의 축이 지구 표면과 만나는 남극점. 자침이 가리키는 남쪽 끝)을 지나, 남극점에서 155킬로미터 떨어진 남위 88도 23분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섀클턴의 탐험으로 남극점 정복의 희망을 엿본 스코트는 제2차 남극 탐험대를 조직했다. 영국인들은 최초 남극점 정복의 영예가 영국에 돌아오기를 바라며 스코트의 탐험대를 열렬히 성원했다.
1910년 6월 1일, 스코트의 탐험대는 테라 노바 호를 타고 영국을 출발하여 오스트레일리아에 정박했다. 이 때 스코트는 북극 탐험을 위해 떠났던 노르웨이의 아문센으로부터 방향을 돌려 남극으로 향하게 되었다는 전보를 받는다. 스코트로서는 남극 탐험의 강력한 도전자가 생긴 셈이었다. 뉴질랜드에 들러 테라 노바 호에 만주산 조랑말 19마리, 개 34마리와 자동썰매 3대를 싣고 스코트 일행은 남극으로 향했다. 1911년 1월 스코트는 로스 해의 빙하를 겨우 피해 로스 섬에 상륙하여 짐을 내렸다. 그러나 장비를 내릴 때부터 자동썰매 한 대가 바닷물에 빠져 못 쓰게 되었고 나머지 두 대도 얼마 가지 않아 고장나 버렸다. 2월까지 스코트 일행은 탐험 경로에 미리 식량과 장비를 저장하는 저장소(depot)를 만들기 위해 예비 여행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부터 조랑말이 추위에 약하고 썰매를 잘 끌지 못해 남극 탐험에 부적합하다는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자동썰매와 말썰매는 처음부터 차질을 빚고 있었다. 남극의 겨울을 보내고 여름에 접어든 10월 24일 스코트는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남극으로 목표를 바꾼 아문센
이 때 아문센 일행은 이미 나흘을 앞서 출발하여 이미 제1저장소에 닿아 있었다. 아문센의 기지는 스코트보다 100킬로미터나 더 남극점에 가까웠다. 출발부터 아문센은 스코트를 크게 앞질렀던 것이다.
로알 아문센은 1872년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 15세부터 탐험에 뜻을 두고 북극 탐험을 꿈꾸었던 그는 아들의 안위를 바랐던 홀어머니의 뜻을 어길 수 없어 의대에 진학했지만 축구와 스키를 통해 항상 체력을 단련하고 있었다. 21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는 미련 없이 대학을 중퇴하고 탐험가의 길로 접어든다. 해군에 복무하며 일등항해사 면허를 따고 선원 경험을 쌓은 뒤 25세가 되던 1897년에는 일등항해사로서 벨기에의 남극 탐험대에 참가하여 겨울을 남극해에서 보냈다. 1903년, 그는 배를 타고 자북극을 확인하였고 1905년에는 북서항로를 완주하는 데 성공했다.
피어리의 북극점 정복 소식이 전해졌을 때 아문센은 북극점 탐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은 아문센의 일생의 목표를 한 순간에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남극으로 눈길을 돌렸다. 1910년 6월, 그는 노르웨이의 탐험가 난센에게서 빌린 프람 호를 타고 원래 계획대로 북극점 탐험에 나섰다가 배 위에서 탐험대원들의 동의를 구하고 남극으로 항로를 바꿨다. 그의 발표로 스코트 탐험대는 긴장했고 영국인들은 아문센을 맹렬히 비난했으나 세계는 이 세기의 대결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
아문센의 탐험대는 스코트의 탐험대와 여러 모로 달랐다. 우선 숫자 면에서 스코트의 탐험대가 55명으로 구성된 데 비해 아문센의 탐험대는 9명으로 구성되었다. 소수 정예대원들과 함께 아문센은 스코트처럼 로스 해로 향했으나 로스 섬에 정박하지 않고 더 안쪽의 빙붕(바다가 얼음으로 내내 덮여 있는 곳)으로 배를 정박시켰다. 이로써 스코트보다 남극점에 100킬로미터 더 접근하여 남극 탐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조랑말에 주로 의지한 스코트와 달리 북극 에스키모들이 이용하는 개썰매를 물자 수송수단으로 이용하였다. 늑대와 교잡종으로 알려진 허스키들은 추위에 매우 강한 데다가 여러 마리가 썰매를 끌기 때문에 어쩌다 한 마리가 크레바스(빙하의 표면에 생긴 균열)에 빠져도 구해내기 쉬웠다. 게다가 아문센은 개를 식량으로도 이용할 요량으로 짐을 최소화하고 썰매를 가볍게 했다.
남극의 겨울 동안 아문센의 탐험대는 사전 답사와 저장소 설치를 마쳤다. 답사 대원들은 남위 82도까지 저장소를 만들어놓고 돌아왔는데, 주도면밀한 아문센은 저장소 위치가 쉽게 파악되도록 주위에 깃발을 많이 꽂게 했고 썰매가 무겁다는 대원들의 말에 따라 썰매 무게도 대폭 줄이고 썰매에 바퀴를 달아 바퀴 회전에 따라 얼마나 이동했는지 거리를 측정할 수 있게 했다. 철저한 계획을 세운 뒤 1911년 10월 19일, 아문센은 대원 네 명과 함께, 썰매 4대를 끌 허스키 42마리를 데리고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나머지 대원들은 기지 인근을 탐사하고 기지를 지켰다.
개들은 썰매를 몰고 사람은 스키를 지치며 일행은 전진했다. 가는 곳곳에 크레바스와 예기치 못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아문센의 계획은 별 차질없이 진행되었다. 썰매를 끌던 개 한두 마리가 크레바스에 빠지면 사람들이 달려가 끌어올렸고, 대원 중 한 사람이 빠져도 안전 자일 덕에 구조할 수 있었다. 일행은 가는 길목 곳곳에 표식을 많이 만들어 돌아올 때를 대비했으며, 11월 3일, 남위 82도에 도달한 이후부터는 위도 1도씩 전진할 때마다 식량저장소를 만들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짐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여 가는 도중 개 몇 마리를 잡아 식량으로 이용하고 남은 고기는 저장소에 두기도 했다.
눈과 얼음, 바람을 뚫고 일행은 강행군을 계속했다. 무엇보다 스코트 일행이 그들을 앞서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과 경쟁심리가 아문센의 지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12월 14일, 관측기 바늘과 썰매의 거리계가 마침내 남위 90도를 가리켰다. 영국 탐험대가 지나간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문센은 남극점에 노르웨이 국기를 꽂고 신에게 감사기도를 드렸다. 3일간 남극점에서 머문 일행은 올 때 남겨 놓은 표식과 저장소 덕분에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다. 기지에 도착한 것은 이듬해 1월 25일의 일이었다.
스코트의 비극
아문센에 비해 스코트의 행로는 몇 갑절 험준했다. 스코트가 믿었던 조랑말은 남극점으로 향할 때 이미 8마리밖에 움직일 수 없었고 그나마 추위에 약해 얼마 못 가 다 쓰러지고 말았다. 날씨도 좋지 못해 눈보라로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아문센이 남극점을 밟은 그 순간 스코트 일행은 사력을 다해 빙벽을 넘고 있었다. 개썰매를 잘 모는 사람이 없어 개들을 다시 돌려보냈으며 마지막 남은 조랑말도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해 사살한 데다 자동썰매 두 대도 고장이 났기 때문에 결국 사람이 무거운 썰매를 끌어야 했다. 따라서 예정보다 전진이 느렸고 그만큼 식량 문제가 심각해져갔다.
남위 87도 34분 위치에서, 스코트는 그와 함께 남극점으로 전진할 대원 4명을 선발한 다음 나머지 대원을 돌려보냈다. 눈보라와 무거운 썰매 때문에 대원들의 컨디션은 나날이 나빠졌지만, 식량도 부족했고 아문센의 탐험대가 먼저 도착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와 남극의 겨울이 닥치기 전에 남극점 정복을 마치고 되돌아가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마침내 1월 18일, 스코트 일행은 남극점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은 펄럭이는 노르웨이 국기를 비롯하여 5주 전에 아문센 일행이 남기고 간 여러 흔적과 마주치고야 말았다. 그들의 좌절과 낙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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